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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마음을 상징하는 차분한 이미지

낱말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개념이 더 선명해질 때가 있습니다. '알렉시시미아(alexithymia)'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없다'는 뜻의 a, '단어'라는 뜻의 lexis, '감정'이라는 뜻의 thymos가 합쳐진 말이에요. 풀어 쓰면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상태' 정도가 됩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감정표현불능증'이라고 옮기고요.

이 용어는 1973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 피터 시프네오스(Peter Sifneos)와 존 네미아(John Nemiah)가 처음 제안했습니다. 두 사람은 심신증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특이한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몸의 통증이나 불편함은 뚜렷하게 호소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이 관찰에서 출발한 개념이 지금은 정신의학을 넘어 심리학 전반에서 폭넓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알렉시시미아, 정확히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네미아와 시프네오스는 이 상태를 크게 네 가지 특징으로 정리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 감정을 몸의 반응(가슴이 답답함, 속이 불편함 등)과 구분하기 어려우며, 느낀 감정을 말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고, 상상하거나 공상하는 폭이 좁은 편이며, 사고방식이 구체적이고 사실 위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죠.

여기서 중요한 건, 알렉시시미아가 감정이 아예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정은 몸 안에서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름 붙이는' 단계에서 유독 어려움을 겪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차갑다'거나 '무심하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개념을 처음 접하면 냉정하거나 감정이 메마른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인 경우도 많아요.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지 못하다 보니, 오히려 몸으로는 두통이나 소화불량, 만성적인 피로 같은 형태로 감정이 새어 나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마음이 힘든 상태를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채,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 셈이에요.

주변 사람 눈에는 "왜 저렇게 반응이 없지" 싶을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은 뭔가 불편한 건 분명한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짚어내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그냥 지친 건지조차 스스로 헷갈리는 상태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요.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알렉시시미아가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의 설명이 함께 다뤄집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던 성장 환경, 감정보다 성과와 절제를 중시하는 문화적 분위기, 감정을 처리하는 뇌 영역과 관련된 개인차, 큰 스트레스나 힘든 사건을 겪은 뒤 감정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던 경험 등이 함께 거론되곤 합니다.

다만 이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알렉시시미아를 타고난 기질적 특성으로 보는 시각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대처 방식으로 보는 시각이 함께 존재하거든요. 대체로는 이 둘이 서로 겹쳐서 작용한다고 보는 편입니다.

생각보다 드물지 않습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연구진이 개발한 TAS-20(Toronto Alexithymia Scale)이라는 척도가 지금도 이 개념을 연구할 때 가장 널리 쓰입니다. 이 척도를 활용한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일반 인구 중에서도 대략 10명 중 1명 정도는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알렉시시미아 특성을 보인다고 보고돼요.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만성 통증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비율이 훨씬 높게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왜 이렇게 내 감정을 잘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해서 유별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드물지 않은, 흔히 있는 경험에 더 가깝습니다.

감정 인식 능력을 조금씩 키우는 방법

  • 감정에 더 구체적인 이름 붙여보기: "기분 나쁘다" 대신 짜증인지, 서운함인지, 억울함인지 몇 가지 후보를 놓고 골라보는 연습을 반복하면 감정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조금씩 선명해집니다.
  • 몸의 반응부터 관찰하기: 감정을 바로 짚어내기 어렵다면, 어깨가 뭉쳤는지 속이 답답한지 같은 몸의 신호부터 살펴보는 게 오히려 더 쉬운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 감정 단어 목록을 옆에 두기: 표현할 어휘 자체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다양한 감정 단어가 정리된 목록을 참고해 지금 상황에 맞는 단어를 하나씩 골라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 말 대신 글로 옮겨보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라도, 글로 천천히 적어 내려가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는 습관은 감정 조절 방법의 첫 단계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감정을 표현할 기회 자체가 부족했던 경우라면 정서적 방치 자가진단 글도 함께 참고해볼 만해요.

스스로 진단하기보다는

TAS-20 같은 척도는 연구와 임상 현장에서 쓰이는 도구이지, 인터넷에 떠도는 버전을 풀어보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기 위한 도구는 아닙니다. 지금 느낀 결과만으로 "나는 알렉시시미아다"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게 유독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편이 더 현실적입니다.

이 어려움을 스스로 다그치는 태도로 대하면 오히려 감정을 더 알아차리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련해서는 자기비판 멈추는 법 글도 함께 참고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어려움 때문에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오해가 쌓이거나, 몸의 증상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원인을 찾기 어렵다면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 상담을 통해 감정을 다루는 연습을 함께 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과정 자체를 다루는 감정 중심 치료(emotion-focused therapy) 같은 상담 접근도 있으니까요.

감정을 몰라서 답답한 건 게으름도, 무심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신호를 좀 더 정교하게 읽어내는 연습이 필요한 상태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아요. 오늘 하루, 문득 마음이 불편한 순간이 있다면 그 감정에 이름 하나 붙여보는 것부터 시작해봐도 좋겠습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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