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물은 쿠팡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전념과 무한 탐색 모드를 상징하는 차분한 이미지

2018년 5월, 하버드 로스쿨 졸업식 연단에 한 졸업생이 올라섰습니다. 축사치고는 다소 낯선 주제의 이야기였는데, 영상이 온라인에 올라간 뒤 지금까지 누적 3천만 회 넘게 재생됐다고 알려져 있어요. 연설자는 피트 데이비스(Pete Davis)였고, 그가 짚은 문제는 '요즘 세대는 좀처럼 전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데이비스는 이 상태를 '무한 탐색 모드(Infinite Browsing Mode)'라는 말로 정리했습니다. 연애 상대든 직업이든 살아갈 동네든, 더 나은 선택지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붙들려 결정을 계속 미루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 연설은 이후 『전념(Dedicated: The Case for Commitment in an Age of Infinite Browsing)』이라는 책으로 확장됐고, 국내에는 신유희 번역으로 상상스퀘어에서 2022년 출간됐습니다.

'무한 탐색 모드'는 왜 편안하게 느껴질까요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중해 보이고, 실수를 피하는 합리적인 태도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문제는 '조금 더 둘러보자'는 판단이 습관이 되어, 결정을 미루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눈앞의 관계나 일,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는 대신 계속 다음 선택지를 살피는 데 에너지를 쓰게 돼요.

책은 이런 태도가 개인의 나약함이라기보다, 선택지 자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대의 산물에 가깝다고 봅니다. 진로, 연애, 거주지, 심지어 취미까지 끝없이 비교하고 검색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이 정도면 됐다'고 마음을 정하는 일 자체가 예전보다 훨씬 어려운 결정이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선택지가 많을수록 오히려 불안해지는 이유

선택지가 늘어나면 만족도도 함께 올라갈 것 같지만, 심리학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저서와 강연을 통해 '선택의 역설(paradox of choic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선택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지고, 결정을 내린 뒤에도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만족감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이에요.

전념을 미루는 심리도 비슷한 결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선택을 확정 짓는 순간 다른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느낌 때문에, 차라리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편을 무의식적으로 택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태가 길어질수록 삶의 방향은 오히려 흐릿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 『전념』이 제안하는 회복의 방향

데이비스는 무한 탐색 모드에서 벗어나는 길을 '목적, 공동체, 깊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합니다. 어딘가에, 누군가에, 무언가에 스스로 뿌리를 내리기로 정하는 행위가 이 세 가지를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관점이에요. 반대로 계속 열어두기만 하는 태도로는 어느 것도 충분히 깊어지기 어렵다는 게 책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전념은 '완벽한 선택을 찾아냈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채로도 지금 이 자리에 머물기로 정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은 완벽주의 내려놓는 방법 글에서 다룬 '충분히 좋다'는 감각과도 맞닿아 있어요.

전념하기로 정한다는 게 막상 무엇을 뜻할까요

책과 관련 자료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실천 방향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모든 선택지를 영원히 닫는 대신, "이번 한 시즌은 이 일에 집중해보겠다"처럼 기간을 정해 임시로 전념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 일이나 관계가 조금 지루해지는 순간마다 '더 나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동으로 올라온다면, 그 생각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전에 한 번 멈춰서 알아차려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 혼자 결정을 완결 짓기보다, 같은 곳에 전념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경험이 전념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고 책은 이야기합니다. 작은 모임이나 반복되는 루틴에 의도적으로 곁을 두는 것도 방법이에요.

이 과정에서 결정 자체를 유난히 어렵게 느낀다면 결정장애 극복하는 방법 글의 선택 피로 관리법도 함께 참고해볼 만합니다.

전념이 오히려 위험한 신호일 때도 있습니다

다만 모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무한 탐색 모드는 아닙니다. 관계 안에서 반복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거나, 일터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고 있다면 그 자리에 머무는 것 자체가 전념이 아니라 방치에 가까울 수 있어요. 전념은 무조건 버티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방향에 힘을 쏟는 태도를 말합니다.

떠나야 할지 머물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만큼 마음이 지쳐 있다면, 그 판단을 혼자 오래 붙들고 있기보다 심리 상담 전문가와 함께 상황을 정리해보는 편이 더 안전한 경우도 많습니다.

3천만 명 넘는 사람들이 그 졸업식 연설에 귀 기울인 이유는, 아마 다들 어느 정도는 같은 마음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더 나은 선택지를 찾아 계속 둘러보는 삶과,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기로 정한 삶 사이에서 말이죠. 오늘 하루, 계속 미뤄온 결정이 하나쯤 있다면 그 목록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출처

이 글과 함께 보면 좋은 주제